[허준혁한방] 섣달그믐 복조리와 복주머니
'설날'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많다. 정초(正初), 세수(歲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신정,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설 또는 설날이라는 우리말이 주는 정취와는 거리가 멀다.
비슷한 느낌의 한자어 원단(元旦), 원조(元朝), 정조(正朝), 정단(正旦) 등의 말도 있다. 설날 아침을 뜻한다. 세밑, 세모(歲暮)는 설날의 전날인 섣달그믐을 가리킨다. '까~치 까~치 설날'이 그날이다.
섣달그믐 자정이 되면 복조리장수가 골목을 돌면서 복조리 사라고 외치곤 했다. 복조리장수가 오면 식구 수나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조리를 구입해, 예쁜 색실을 매어 모양을 내기도 하면서
방 귀퉁이나 부엌에 돈이나 엿을 넣고 묶어 매달아 복과 행운을 기원했다. 복주머니도 복을 담는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이들은 복조리를 이웃집 마당에 던져두고 세배 겸 조리 값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용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싫은 소리를 듣거나 복조리값을 깎는다든지 되돌려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복을 깎고 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조리에는 조리가 쌀을 일듯, 복을 일어주고 재앙을 걸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또 조리의 많은 눈들이 나쁜 기운을 감시하고 돌을 골라 오복 중의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실용적 의미도 있었다. 복조리와 함께 복갈퀴와 복빗자루를 다는 풍습도 있었다. 복을 긁어들인다는 의미였다.
방과 마루, 부엌, 광, 화장실 등에는 수세 즉 '해지킴'이라 하여 촛불이나 등불을 식구수대로 밝혔다. 새해를 신성하게 맞기 위해서였다. 이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을 자면 혼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얼굴에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혼이 얼굴을 찾지 못해 죽는다고도 여겼다. 자는 아이가 있으면 눈썹에 하얀칠을 해 놀리거나 수학여행 때 잠자는 친구들에게 분칠을 하고 졸업식때 밀가루를 씌우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가는 해와 오는 해의 경계에 분칠이라는 가면 놀이로 새로운 단계로의 이동을 준비했던 것이다.
마당에 불을 피워 폭죽을 터뜨리는 풍속도 있었다. 악귀가 폭죽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중에서는 연종포(年終砲)라 하여 한 해를 마감하는 대포를 쏘기도 했다. '제야의 종소리'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섣달그믐은 묵은해를 털어내고 깨끗한 새날을 염원하는 '길 닦음'의 날이다 쌀에서 돌을 골라내야 할 경우가 거의 없어지자 조리자체가 점차 사라지면서 복조리 풍습도 자취를 감추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그 아련한 추억은 소중히 남아있다. 복을 일구고 재앙을 걸러주는 행운의 복조리와 복주머니... 소중한 우리님들 가정에 곱게 달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