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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혁한방] 안창호와 손정도, '사랑과 정의'의 깊은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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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5-03-29 12: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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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혁한방] 안창호와 손정도, '사랑과 정의'의 깊은 울림


'나라 꼴이 기가 막히니 비단보다는 걸레가 되겠다'는 손정도 목사와 '정의가 없는 사랑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운명적 만남과 항일독립투쟁을 21곡의 넘버 속에 담아낸 영화 <호조>...


손정도 목사는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를 담임한 후 고종과의 면담을 거쳐 1919년 3·1 운동 직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도산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상해 임정을 떠나 길림으로 향한 손 목 사가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건 ‘호조(互助)’운동이었다. ‘서로 돕는’ 자급자족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 기지로 삼는데 최종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 땅을 매입해 이상촌 건설에 열정을 쏟았다. 100여 호가 입주했던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손 목사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49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는다. 손 목사의 큰아들 원일은 초대 해군제독이 되어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고, 작은아들 원태는 미국 유학 후 의사의 길을 걸었다.


손 목사는 평양 숭실중학 동문인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교분이 있었다. 김형직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성주를 양자처럼 돌봐주며 후원했고 소년 성주는 훗날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북한은 ‘손정도 기념사업회’를 구성해 추모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자치가 아닌 독립, 타협 없는 저항이란 명확한 목표와 함께, 실천 방안으로 계몽과 조직을 택했다. 이에 따라 만민공동회를 통한 국민 자각을 역설했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현지 한인들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운동을 펼쳤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으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활동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부장, 법무부장, 노동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펼치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1938년 순국하였다.


'사랑과 정의'로 뭉쳐 '백두에서 한라까지, 탐라에서 발해까지’를 노래하며 꽃처럼 스러져간 두 영웅은 오늘의 후손들에게 우리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과 함께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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