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혁한방] 당구공과 틀니, 생수 페트병과 '기후들병'
당구공과 틀니
당구공과 틀니의 공통점은? 답은 플라스틱이다. 당구가 유행하던 19세기 후반, 뉴욕 당구 협회는 상아로 만들던 당구공을 다른 재료로 만들면 1만 달러를 주겠다고 상금을 내걸었다. 무분별한 코끼리 사냥을 막기 위한 대책이었다.
이에 존 웨슬러 하이어트라는 청년이 응모하여 1869년 최초로 플라스틱을 만든 것이 배경이었다. 열을 가하면 어떠한 모양으로든 만들 수 있고, 식으면 상아처럼 단단해지는 '셀룰로이드'를 만들었다.
이후 1870년 특허를 내고 회사를 설립하여 제일 먼저 만든 것이 틀니였다. 그 뒤로 상자, 단추, 자, 필름 등 다양한 물건들이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다.
플라스틱 스모그와 미세 플라스틱
플라스틱은 한때 '신이 내린 축복'으로 불리며 인간의 삶에 중요한 물질로 자리매김했지만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도 함께 얻고 있다.
2023년 3월 국제 학술지 ‘플로스원(PLOS ONE)’에는
‘플라스틱 스모그(Plastic Smog)’란 표현이 등장했다. 플라스틱의 공해를 경고한 것이었다.
최근엔 미세 플라스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5㎜~1㎛(마이크로미터)의 플라스틱 조각을 말한다. 1㎛ 이하는 ‘나노(Nano) 플라스틱’으로 불린다. 나노는 10억 분의 1m 크기에 해당한다.
생수 페트병이나 세제, 화장품, 치약, 의약품 등에도 미세플라스틱이 있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나 호흡기를 통해 체내로 유입될 수도 있다.
호주 연구팀은 1인당 섭취 미세 플라스틱이 매주 신용카드 1장(5g, 2000개) 분량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KIAST 한국분석과학연구소가 2023~2024년 페트병 생수 27개 제품을 수거·분석한 결과 70%(19개)에서 5㎛ 이상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검출됐다.
연간 5000억 병, 생수 플라스틱 페트병
전 세계적으로 생수 플라스틱 페트병 생산량은 연간 5000억 병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만 매년 56억 병의 생수용 플라스틱 페트병이 생산된다. 지구를 열네 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국내 생수 시장은 2010년 약 3900억 원에서 2023년 2조 3000억 원으로 8배 이상 증가했다. 생수 용기를 플라스틱 아닌 다른 대체재로의 전환이 시급하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4년 발간한 ‘2040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정책시나리오’에서 한국은 2030년까지 60%, 2060년까지 80%로 재활용률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2021년 기준 한국의 플라스틱 생활폐기물 재활용률은 56.7%였다. 2023년 충남대 연구진이 소각을 통한 에너지 회수를 빼고 계산한 실질적 재활용률은 16.4%에 불과했다.
지구에 발생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매년 4억 톤 가까이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플라스틱이 썩는 데는 약 5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 최초로 개발된 플라스틱이 아직도 썩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97년 서울 개최 이후 28년 만에 올해 6월 5일 한국 제주도에서 다시 개최되는 UN 세계 환경의 날 기념식의 주제도 '플라스틱 오염종식'이다. 6월 2일부터 5일까지 자원순환 주간으로 정해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주제로 다양한 국제 행사들이 진행된다.
시민들의 기후이해력과 '기후들병'
플라스틱 오염종식과 관련해서는 시민들의 기후이해력(Literacy)이 중요하다. 일회용 플라스틱병이나 컵 대신 텀블러 사용도 적극 권장되고 있다. 제조와 폐기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고려할 경우, 텀블러가 친환경이 되려면 플라스틱 텀블러는 50회 이상, 스테인리스 텀블러는 220회 이상 재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일회용 컵보다는 온실가스를 훨씬 줄일 수 있다.
일회 용기 대신 음료수나 물을 담는 병을 텀블러(Tumbler)라고 부른다. 텀블러의 어원은 ‘굴러가다’라는 뜻의 영어 텀블(Tumble)이다. 손잡이가 없는 원통형이라 잘 굴러다닌다는데서 유래했다. 앞 구르기 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덤블링'과 같은 어원인데, 이는 텀블링을 잘못 발음한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2014년 10월 ‘텀블러(Tumbler)’를 대신할 말로 ‘통컵’을 선정했다. 쉽게 와닿지 않고 어감도 썩 좋지는 않다. 이에 필자는 물이든 커피든 각종 음료 등을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는 병 또는 통이라는 뜻에서 그냥 통틀어 들병이라 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갖고 다니는 들병이라는 의미를 더해 '기후들병'이라고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저마다 편리하고 특색 있는 '기후들병'을 일상생활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하여, 기후위기대응에 대한 실질적 실천과 함께 '기후위기'라는 개념 역시 더욱 빨리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